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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양반들의 집성촌!!

경주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양반들의 집성촌!!

이번 포스팅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경주 양동마을 이야기이다. 이곳은 대략 500년 전부터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집성촌으로써 조선시대 양반들의 삶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다. 안동 하회마을보다 상업적인 손길이 덜 탄곳으로 경주 시내에서는 20KM정도 떨어져있었다.

 

경주 양동마을에는 아직까지도 마을의 후손들이 기와집 뿐 아니라 초가집 등에 거주하고 있었다. 625 전쟁 이전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군락을 형성하며 거주했다고 한다. 관광객으로써 직접 안쪽까지 둘러볼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으나,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광경으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 했다.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시대의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혼인을 한 신랑이 처가에 따라가서 사는 풍습이 있었는데, 양만공 손소가 풍덕 류씨와 결혼하여 이곳에 들어온것을 계기로 경주 손씨가 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입장료는 성인 4천원, 청소년/군인 2천원, 아동은 1.5천원이었으며 주차료는 무료였다. 경주 양동마을을 둘러보는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왠만하면 무료 해설시간에 맞추어 해설자와 함께 관람하는 것이 좋다. 9시 30분부터 30분 간격마다 해설이 진행되니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지도에서 대략 6시 방향의 해설자의 집부터 시작하여 양동마을을 한바퀴 둘러본다. 빨간글씨로 4곳이 쓰여 있었는데, 이곳이 오래된 고택을 직접 안쪽까지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현재 관과정과 향단고택은 공사중이기에 출입이 불가했다.

입구에서는 1909년에 지어진 양동초등학교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현재는 학급 인원수가 71명에 불과하지만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70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원을 자랑했다고 한다. 초등학교가 리모델링이 되었는지 고급스러운 기와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초등학교를 지나니 양동 마을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어우러져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속 한 장면에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채 1/3 밖에 되지 않을만큼 뒤쪽 공간도 방대하다. 언덕 뒷편에도 수많은 고택들이 산적해 있으므로 사진을 찍으면서 구석구석 돌아본다면, 최소한 두시간 정도는 잡고 걸어야 할 듯 하다.

경주 양동마을 곳곳에는 내 키만한 접시꽃이 피어있어 마치 관광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 했다. 해설자분과 다른 가족팀과 함께 이곳저곳 둘러보기 시작했다.

 

해설을 해주셨던분은 하루에도 4~5번씩 관광객을 대상으로 양동마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 여러명의 해설자가 대기하고 있으며 요일 중에는 월요일이 비교적 한가하다고 한다. 다만 월요일은 유물관이 휴관이라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이렇게 기와집 뿐 아니라 초가집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와집은 그렇다쳐도 초가집에 아직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현대적인 초가집이지만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편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곳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있기에 함부로 리모델링을 할 수 없으며, 옛날 그대로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어르신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금세 마을을 한눈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높은 지대에서 아래쪽을 바라보면, 소작농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으며 저 멀리로는 경주 시내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경주 양동마을을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 소과 뿐 아니라 대과에 합격한 고위직 관료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당시 대학교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옥산서원이 이곳에 있는데, 당시 이곳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평소에 말로만 듣던 '초가삼간'의 모습이 바로 위의 형태라고 한다. 초가집에 마당이 있을뿐더러 자동차까지 주차되어진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해서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엇다. 그리고 마을 중간중간에는 친절한 안내판들이 있어 길을 헤맬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이렇게 높게 쌓여진 돌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본 것 같다. 조선시대 당시 계급사회의, 양반과 노비와의 넘볼 수 없는 신분의 격차를 보여주는 듯 하다.

조선시대의 모습을 떠올리면 왕이 살던 궁궐 외에는 구한말 외국인이 사진으로 남긴 무너져내려가는 초가집이 떠오른다. 그런 모습이 일상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당시는 계급사회였기에 양반과 노비의 신분의 격차는 컸겠으나, 삶의 터전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길거리에 핀 해바라기와 접시꽃 만큼이나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현재 2~30억 하는 아파트에 임대주택이 함께 살아가는것과 마찬가지 라고 해야할까?

경주 양동마을에서는 송첨 고택에 직접 안으로 들어가볼 수 있었다. 마침 이 고택에 거주하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차를 세워두고 나오셨는데, 우리를 보면서 '어서오세요~'라고 건네준 인삿말이 왠지 묘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건물 내부에 뜬금없이 담이 있어 의아했는데 해설사님의 말로는 남자와 여자의 방을 구분해주는 담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남녀차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흔적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곳에는 경주 손씨의 큰 종가로써 '忍 (참을 인)'을 100번 쓰며 인내심을 기른다는 '서백당' 현판이 걸려있었다. 500년이 넘는 향나무 뿐 아니라 사랑채 뒷편의 경치도 남달랐다.

 

이곳에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현인 세명이 배출될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현재까지 두명의 위인이 태어났고 한명은 후대에 태어날 것이라는데 과연 누구일지..ㅎㅎ

고택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기념사진을 남겨드렸다. 아쉽게도 성이 '구'씨 이므로 전생에 이곳과는 연이 없었던것으로..

경주 양동마을의 길을 걸으면서 마치 시간이 멈춘듯, 한폭의 그림같은 길이라고 느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경주에서 충분히 가볼만한 곳이 아닐까 싶다.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곳 양동마을에도 한번 들러보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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