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로써 일종의 회고록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과 '마라톤을 한다는 것'에 대한 공통점을 찾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데, 마치 그의 일기장 속을 들춰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물론 대단한 마라톤 주자는 아니다.
나는 물론 대단한 마라톤 주자는 아니다. 주자로서는 극히 평범함(오히려 그저 평범한 주자라고 할만한)그런 수준이다. 그러나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의 편린 같은 것이 보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하면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타고난 글솜씨를 지닌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려 30살까지 장사를 했던 일반인이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위해 10년 가량 노력하여 키워온 사업을 과감히 포기했다. 결혼 후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 그 뿐만 아니라 남편의 의견을 믿고 따라준 부인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지속함과 동시에 불도저같은 노력으로 그는 결과적으로 인생을 건 도박에서 승리했다고 보여진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그만 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한가득 있다.
그 당시 썼던 이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고 발견한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햇수와 거의 같은 횟수의 풀 마라톤을 완주한 지금도, 42킬로를 달리고 나서 내가 느끼는 것은, 처음 그리스에서 마라톤까지 달려갔던 그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단한다면 틀림없이 평생동안 달리지 못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말이다.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계기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종일 앉아서 글쓰는 생활로 인해 떨어지는 체력을 조절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소설가의 주요 덕목으로 재능, 집중력, 지속력 등을 꼽고 있다. 이에 있어 자신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매일 달리기를 하면서 체력을 단련했다고 한다. 마라톤풀코스 25회, 철인3종경기, 100킬로를 뛰는 울트라마라톤, 트라이애슬론에 참여할 때마다 느리게 뛰었음 뛰었지 스스로 한번도 걸어본적이 없다고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한번도 지지 않았다는 그의 묘한 뿌듯함을 엿볼 수 있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운'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속적인 '노력'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게되었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그녀들에게서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하는 것은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대게 살아가면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아쉬워함과 동시에 지난 추억들에 대해 그리워한다. 나 또한 20대를 넘어 30대 초입에 들어섰지만 가끔씩 벌써 이나이가 되었나 하면서 지난 20대를 그리워 하곤 한다. '내가 옛날로 돌아갔으면 ~ 했을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정말 다른 삶을 살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나에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나만의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와 다른 페이스로 달리는 사람들에 대해 경쟁하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상위 1%의 사람들은 부모덕에 '돈'에 있어서 풍족하겠으나 동시에 '꿈'을 좇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 이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굳건한 의지로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해왔을 것이다. 내 주위만 돌아봐도 확고한 목표를 정한 친구들은 하루가 무섭게 나를 앞서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워커홀릭으로?
내 인생을 42.195km의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종착점과 그로 향하는 루트는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남들보다 빠르게 목적지까지 2시간 내에 주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회사를 예로 들어보자면 모두 다 임원을 바라보면서 회사일에 올인할 필요는 없다. 각자 저마다의 페이스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회사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평일 야근과 이어지는 회식 그리고 주말 출근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일에 파묻혀 3~50대를 살아간다면 그 끝에는 임원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나 소수만이 쟁취하게 된다. 결국 회사 외의 삶에서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 중독자, 워커홀릭으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내는 것이다.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떠한 것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 모호한 것은 사실이나 최소한 1년에 두번은 여행을 다니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글이나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말이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그러한 삶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을 하고 있는지, 부족하다면 최소한 앞으로 좀 더 노력할 생각은 있는지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책이었다.
|
'일상 > 책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feat : 가난에 대한 편견과 인식전환의 필요성) (12) | 2020.03.31 |
---|---|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다치바나 다카시 (feat : 일본 교육제도 vs 한국 교육제도) (16) | 2020.03.25 |
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feat : '문화 상대주의'는 상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 (13) | 2020.03.22 |
세계 최고의 인재들은 왜 기본에 집중할까 - 도쓰카 다카마사 (feat : 월요병은 전세계에 실존한다) (28) | 2020.03.19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feat : 사랑을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 표현이다) (8) | 2019.11.24 |
그 섬에 가고싶다 - 임철우 (feat : 모든 사람은 본디 별이였단다) (2) | 2019.11.23 |
여행할 권리 - 김연수 (feat : 나의 젊음은 푸르다) (2) | 2019.11.19 |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 무라카미 하루키 (feat : 완벽의 존재는 실존하는가?) (0) | 2019.09.23 |